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부사와 에이이치 (문단 편집) === 이후 === 1889년부터 15년간 [[도쿄도|도쿄부]] 후카가와구(현 도쿄도 고토구)[* 도쿄대공습으로 황폐화된 후 1947년 [[고토구]]에 통합되었다.] 구회의장을 역임했다. 또한 제1회 [[중의원]]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, 지역구인 도쿄5선거구에서 아흔 넷 유효표가 나와 2위를 기록했다. 1890년 제국의회 [[귀족원(일본)|귀족원]](상원의원)에 당선되었다. 그러나 본회의에 1회 참석한 후 1년 뒤 사임하였다. [[간토 대지진]] 당시 천견론을 주장했다. 천견론이란 세상의 이기적인 풍조를 본 자연이 [[천벌]]을 내려 개혁을 촉구했다는 주장이다. 이후 사회에서 부패한 부르주아와 현대 산업 문명을 비판하고 평등과 자연 회귀를 찬양하는 유행어로 사용되는 일이 늘어나자 이 주장의 부자연스러움을 나타내면서 "지금 천견을 말하는 자들이 정말 천견을 아는지 모르겠다."면서 불편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. 1926년과 1927년에 [[노벨평화상]]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다. 1931년에 향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. 사망 후 정2위[* 현대 일본에선 1년 이상 재임한 역대 총리 사망 시 추서 됨]의 위계가 추서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